드라마 안나 후기, 거짓말보다 더 무서웠던 건 그다음이었다

드라마 「안나」를 처음 보면 자연스럽게 '거짓말'에 집중하게 된다.
유미가 자신의 학력과 이름, 살아온 과정까지 하나씩 바꿔가면서 결국 완전히 다른 사람인 안나로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니 이상하게 거짓말 자체보다 그 이후가 더 기억에 남았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었던 거짓말 하나가 다음 거짓말을 만들고, 나중에는 본인조차 이전의 삶으로 쉽게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과정.
그게 생각보다 답답하고 무서웠다.
안나는 시작부터 주인공을 마냥 응원하기가 어려운 드라마다.
유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되는 순간이 있는 반면, 그렇다고 해서 유미가 하는 행동을 전부 이해해주기도 어렵다. 보면서 몇 번이나 '여기에서 그만두면 되잖아'라는 생각이 드는데 신기하게도 유미는 계속 앞으로 간다.
처음부터 엄청난 사람이 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자신을 실제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고 싶었던 마음, 무시당하기 싫었던 마음 같은 것들이 조금씩 쌓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거짓말의 크기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다.
이 과정이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는데도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거짓말이 성공할 때마다 유미의 기준이 조금씩 바뀌는 모습이 보인다.
한 번 들키지 않았으니 다음에도 괜찮을 것 같고, 그렇게 얻은 대우와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제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안나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사람이 거짓말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한 번 다른 삶을 살아본 사람이 다시 원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였다.
유미가 안나가 되어가는 과정
유미는 처음부터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자기가 원하는 모습과 현실의 차이가 크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한다.
그런 유미에게 자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리고 그 삶은 생각보다 잘 풀린다.
학력도, 경력도 사실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유미가 보여주는 모습을 믿는다. 이전에는 쉽게 얻을 수 없었던 대우도 받는다.
여기서부터 드라마가 꽤 불편해진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안나로 살아가는 유미가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유미일 때는 어디를 가도 조금씩 위축되어 있었는데 안나가 된 뒤에는 말투부터 표정까지 달라진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사람 자체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당연히 편할 리가 없다.
이미 만들어놓은 과거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 질문을 할 때마다 계산해야 하고, 예전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위험해진다.
남들이 보기에는 점점 더 성공하는데 정작 본인은 점점 더 불안해진다.
그 대비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었다.
안나를 보면서 진짜 안나가 계속 신경 쓰였던 이유
유미만큼 기억에 남는 인물은 진짜 안나였다.
진짜 안나는 유미가 일하던 곳의 원장 딸이고, 처음부터 유미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유미가 갖고 싶어 했던 것들을 안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다.
좋은 환경도 그렇고, 학력도 그렇고, 돈도 그렇다.
그런데 정작 안나는 그것들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차이가 둘의 관계를 더 묘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갖고 싶었던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어서 특별할 것도 없는 것일 수 있다.
유미가 진짜 안나를 바라보면서 느꼈을 감정도 단순히 부러움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기도 했을 것 같다.
그래서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관계가 더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수지 연기가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남았다
안나 이야기를 하면서 수지 연기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사가 많은 장면보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장면이 더 기억에 남는다.
특히 유미일 때와 안나일 때 분위기가 꽤 다르다.
유미일 때는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안나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표정이 훨씬 단단해진다.
그렇다고 완전히 자신감 넘치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겉으로는 태연한데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계속 남아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안나가 성공할수록 오히려 편하게 보이지 않는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까지 올라가는데도 이전보다 행복해졌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켜야 할 게 계속 늘어난다.
화려한데 이상하게 차가운 드라마
개인적으로 안나의 분위기도 꽤 좋았다.
화려한 옷이나 공간이 많이 나오는데 화면 전체에서는 묘하게 차가운 느낌이 난다.
특히 유미가 안나로 자리 잡은 이후부터 그런 느낌이 강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성공한 사람의 삶인데 보고 있으면 전혀 부럽지가 않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을 계속 꾸미고 있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다음 화를 계속 보게 된다.
안나가 어디까지 올라갈지가 궁금하다기보다 이 거짓말이 도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무너질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신기한 건 계속 거짓말을 하는 유미를 보면서도 완전히 미워하기는 어려웠다는 점이다.
분명 잘못된 선택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 시작점에 있던 감정 자체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
내가 가진 것보다 조금 더 가진 척하고 싶은 마음.
대부분 한 번쯤은 느껴봤을 법한 감정이다.
유미는 그걸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가버린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더 불편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나와 전혀 다른 이상한 사람의 이야기였다면 그냥 구경하면 됐을 텐데, 시작은 의외로 평범한 감정이었으니까.
「안나」는 보고 나서 속이 시원해지는 드라마는 아니었다.
오히려 보는 내내 조금 답답하고 불안하다.
그런데 다 보고 나면 몇몇 장면과 유미의 표정이 꽤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도 계속 남았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가 실제 나와 너무 달라졌을 때, 어느 쪽이 진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유미는 거짓말로 안나를 만들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안나로 살아버렸다.
그래서 마지막쯤에는 유미가 안나를 연기하는 건지, 아니면 이미 안나라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지도 애매하게 느껴진다.
아마 이 찝찝한 느낌 때문에 「안나」가 단순한 거짓말 이야기로만 기억되지는 않을 것 같다.